매티 테이트 Mattie(Martha) Samuel Tate 최마태
- 출생: 1864년11월24일, 미국 남부 미조리 주 캘러웨이 카운티
- 교육: 1880년도 즈음 부터 시노디컬여자단과대학(Synodical Female College)에서 고등교육 수료. 졸업 후에도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와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 (Union Seminary, Virginia)에서도 각각 수개월씩 수학.
- 성장배경(부모님의 영향력)
– 부친, 캐빈 테이트(Calvin Howe Tate, 1879년 7월 14일 소천-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14세)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모교회 올드 옥스배스장로교회(Old Auxvasse Presbyterian Church)교회학교 부장 지도자– 모친, 메리 테이트(Mary Jane Payton Tate, 1890년 6월 16일 소천-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26세)
부군과 사별 후 11년(당시 모친 나이 59세) 홀로 농장을 경영하며. 어린 남매 둘(당시 나이 각각 16,14세), 오빠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Lewis B. Tate)와 매티 테이트 선교사(Mattie S. Tate)를 교육 - 한국 입국: 1892년 11월 3일 (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28세)
- 전주 지역선교의 시작(1894): 1894년 3월 19일, 전주 1차 방문(6주간)
- 전주동학혁명운동 기간 이후 위기의 국내외 정세(1894.4.~1895)
- 전주선교부(Chunju Station)설립 준비(1895.2)/벨부부 한국 도착 (1895.4.9)
- 전주선교부(Chunju Station)설립: 1895.12.25 이후 전주 사역 시작
- 여성기독교교육 중등학교 기판 마련 및 여성사역 활성화: 1898년 완주 사택에서, 기독교여자중등학교 태동, 여성 기독인 성경공부반 연례모임, 전주지역 여전도회(Women’s Missionary Society)조직, 강인하고 책임감 강한 독신여성 순회전도자 사역 감당
- 오빠 루이스 테이트(L.B.Tate) 선교사의 소천(1929): 병환으로인해 1925년까지의 한국 사역마무리 후 본국 요양 중, 1929년 2월 19일, 향년 66세로 소천
-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 은퇴(1935) 이후 : 1935년 71세의 정년 43년 간의 (1892~1935) 한국선교사역 은퇴, 은퇴 후 그리움에 1936년 다시 전주로 귀환하여 선교사역 시작했으나 1938년 (당시 나이 73세) 다시 본국 귀환
-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 소천(1940): 1940년 4월 1일 (향년 75세)
생애와 중심사역 보고
- 출생: 매티 선교사(M.S. Tate)는 1864년11월24일, 미국 남부 미조리 주 캘러웨이, 풀턴이라는 마을(Fulton, Callaway County, Missouri State, America)에서 모친 메리 테이트(Mary Jane Payton Tate)와 부친 캐빈 테이트(Calvin Howe Tate)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전 배우자와 사별 후 재혼하였기에, 부친 슬하 3남3녀, 모친 슬하 3남2녀의 이복형제가 이미 11명이나 있었지만, 재혼 후 부모님 사이에서 출생한 자녀는 둘 뿐이다. (1남1녀 중 장남: 루이스 테이트 (Lewis B. Tate) 선교사, 장녀: 매티 테이트 (M.S. Tate) 선교사) 매티 테이트(M.S. Tate) 선교사는 총 13형제 중에서도 가장 막내이다.
- 교육: 매티 테이트(M.S. Tate) 선교사는 미조리주 장로교회에서 1853년 웨스민스터대학을 설립한 후 1871년 여성고등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시노디컬여자단과대학(Synodical Female College)에서 1880년도 즈음 부터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나이는 부친을 여읜 다음 해 즈음, 만15세를 넘긴 나이로 추측된다. 매티 테이트(M.S. Tate) 선교사는 시노디컬여자대학을 졸업 한 후에도 루이빌 신학교(Louisville Theological Seminary)와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 (Union Seminary, Virginia)에서도 각각 수개월씩 수학하였다. 당시 여성을 신학교에 정식 입학시키지 않아 단기간만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오빠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선교사는 동교회에서 설립한 웨스터민스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 성장배경(부모님의 영향력)
– 부친, 캐빈 테이트(Calvin Howe Tate, 1879년 7월 14일 소천-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14세)
테이트 선교사의 부친 또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시내티래인신학원(Cincinnati Lane Seminary, 향후 시카고 맥코믹신학교로 흡수된 예비신학과정 교육기관)에서 공부하였다. 하지만 부친은 미국노예제도폐지운동에 가담하면서 더 이상 신학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고 고향(Fulton)농장을 성실하게 운영하여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인물이 되었다. 테이트 가정의 모교회 올드옥스배스장로교회(Old Auxvasse Presbyterian Church)에서도 헌신하여 교회학교 부장 지도자 성실히 활동하며, 자녀들과 다음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교육이 테이트 남매를 대한민국의 7인의 남부지역 개척선교사로 보내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모친, 메리 테이트(Mary Jane Payton Tate, 1890년 6월 16일 소천-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26세)
테이트 선교사 모친은 부군과 사별 후 11년(당시 모친 나이 59세) 홀로 가족을 양육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다른 형제들은 결혼 후 출가시켰고 남은 어린 남매 둘(당시 나이 각각 16,14세), 오빠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Lewis B. Tate)와 매티 테이트 선교사(Mattie S. Tate)를 교육시켰다. 모친 또한 부군과 사별 후 플럭스라는 질병으로 오랜시간 (약 10년) 투병하였고 (Flux: 18-19세기 유행성 질병, 소위 ‘피의 플럭스’, 고열, 복통, 설사, 장내 출혈, 구토 질환), 매티 테이트 선교사(M.S.Tate)가 모친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의 26세에 모친은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하고 풀턴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모친 소천 후 2년 뒤 오빠와 함께 미국남장로교회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7인의 개척 선교사로 파송된다. - 한국 입국: 7인의 개척자 중 리니 데이비스 (Linnie Davis) 선교사는 이채연 부인과 먼저 한국에 도착(1892.10.18)하였지만, 나머지는 일본을 돌아본 후 3주 뒤, 1892년 11월 3일 마침내 제물포 항을 통하여 한국 땅을 밟는다.
(당시 매티 테이트 선교사 나이 28세) - 전주 지역선교의 시작(1894): 1894년 2월, 제3회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오빠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Rev.Lewis B. Tate)와 매티 테이트 선교사(Miss Mattie S.Tate)를 봄철에 전주지역으로 예비 파송하였다가 성공을 거두면, 가을 경 전주 선교부(Chunju station)를 설치하기로 투표로 결의하였다. 1894년 3월 19일, 테이트 남매는 각각 조랑말과 가마를 타고 서울에서 전주를 향해 출발한다. 200마일 쯤의 거리를 6일동안 여행하였고, 가마를 탔던 테이트는 자신의 관절, 뼈, 근육이 자신의 육체의 어디 있는지를 철저히 느낄 수 있는 여행으로 고백할 만큼 힘든 육로 여행이었다. 1893년 초, 윌리엄 전킨 선교사 (W. Junkin) 와 오빠 루이스 테이트(L.B.Tate)가 이미 사전 답사 차 방문하여 매매해두었던 전주의 집에서 머물지만 그 기간은 약 두 달 정도(6주) 뿐이었다. 전주지역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 여성을 관찰하기위하여 매일 4-500명의 인파가 모여들었고, 머무는 집의 창호지 문을 뚫어 관찰하였기에 그녀에게 사생활이란 없었다. 비록 6주간 머물면서 여성이었던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광장거리로 나가보지 못했으나, 오히려 많은 여인들이 그녀의 사택 방에 왔기에 개인적 접촉이 가능하였고 그들에게 복음 전도 유인물을 나눠줄 수 있었다.
- 전주동학혁명운동 기간 이후 위기의 국내외 정세(1894.4.~1895):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불안하여, 전주 동학 농민 봉기운동는 청일 전쟁(Sino -Japanese conflict)을 촉발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동학은 지배계급에 항거하여 일어난 종교적 분파로 이미 남부지방에 크게 퍼져 있었고, 이미 많은 면에서 반외세적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동학당들이 외국악당을 몰아내기위해 집에 불을 놓는다고 위협적 소문이 있었기에 서울 소재 미국공사관은 속히 선교사들을 서울로 복귀시켰다. 이제 막 선교 발판을 놓는 시점에서 테이트 남매 선교사는 전주를 바로 떠나기가 꺼려졌으나, 당분간 전주 사역을 포기하고 상경할 수 밖에 없었다. 전라지역 감영이 있던 전주는 동학도들에게 점령당하여 운동의 거점지가 되었고, 관군이 개입되어 전쟁하던 중 500여명의 동학도들 모두 완전히 살해되어 동학 세력마저 축소되었다. 그러나 동학 혁명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외세 국제관계 형성은 더욱 과도화되었다. 1895.10.8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서양 공관들도 충격을 받고, 국민들은 분개하였다. 세계 국제 여론도 일본을 반대하기 시작하였으며,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난다.
- 전주선교부(Chunju Station)설립 준비(1895.2): 목적 제2차 전주 방문 조사: 동학혁명 사건 이후 레이놀즈(Reynolds) 선교사 와 루이스 테이트(L.B.Tate) 선교사는 전주 선교부(Chunju station) 설립 목적을 위하여 다시, 1895년 2월, 제2차 전주를 방문한다. 그러 동학혁명이후 전주 도시는 전화되어 이전 제 1차 전주 방문 시 만났던 사람들 어느 누구도 찾아 볼수 없었다. 다만 다시 완산 언덕에 두 채의 작은 집을 구입하고 선교부 설립을 준비한다. 1895년 4월 9일, 7인의 개척자는 아니지만 남부지역 선교에 크게 기여한 유진 벨 선교사 부부도 한국에 도착하여 남부지역 첫 선교부 설립을 준비한다. (벨부부 한국 도착: 1895.4.9)
- 전주선교부(Chuunju Station)설립: 1895.12.25 크리스마스 주간, 테이트 남매 선교사는 본격적으로 전주선교부 설립과 사역을 위해 전주로 이동하였다. 현장조사 시 구매한 작은 두 집을 서양식으로 꾸며서 두 선교사의 사택과 전주 교회의 태동의 장소를 마련하고 복음 전도를 시작하였다.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전주 지역 마을 집집마다 찾아가 주민을 위로하고 고아들을 돌보며 여성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한다. 주일학교, 성경공부반, 그리고 성경학원에서 여성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회적 여성 사역(전도 부인 교육, 여성 신도 성경공부, 여성 주민 전도)뿐만 아니라, 전도된 6명의 소녀들을 전제로 한 기전여학교(전주여학교) 설립을 준비하여 기독교교육사업의 기판을 마련하고 그 성장에 크게 기여한다.
- 여성기독교교육 중등학교 기판 마련 및 여성사역 활성화: 1898년 완주의 새 사택 건축 후 이주하여,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자신의 방에서 기독교여자중등학교 기전여학교(Junkin Memorial)를 시작한 셈이다. 같은 해, 1898년 그녀는 전주 지역의 여성 기독인을 모아 성경공부반 시작, 매년 10일간 개최되는 성경공부반을 연례적으로 운영한다. 전주지역 여전도회(Women’s Missionary Society)를 처음 조직하여 전주 지역 활동 전도부인을 지원하며, 제주도에 여성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한다. 그녀는 다른 독신 여성 선교사들이 참가하기 시작한 1914년 전까지 전주지역의 유일한 독신 여성 순회전도 선교사였다. 1914년 이후 여러 독신 여성 선교사가 전주 지역에 부임한다: (새디 버크랜드(Saddie Buckland), 릴리안 오스틴(Lillian Austin), 수잔 콜튼(Susanne A. Colton) 등) 그러나 새로 부임한 독신여성 선교사들이 어학(한국어) 준비를 위해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들은 주로 의료, 사회복지, 여학교 사업 등을 주로 맡았기 때문에 여전히 순회전도 사역은 여전히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가 담당해야 했다. 에밀리 윈(Emily A. Winn) 여성 선교사가 한국어 공부를 끝내고 남동부 순회전도사역을 맡은 것은 1914~1915년부터였다. 1919년까지 전주 지역에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가 방문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느 강인하고 책임감 강한 독신여성 순회전도자 사역을 감당하였다. 순회 전도자 사역을 마감한 후에는 기독교 교육사업에집중하여 각종 주일학교, 성경공부반, 성경학교 등에서 여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 오빠 루이스 테이트(L.B.Tate) 선교사의 소천(1929):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의 오빠 루이스 테이트(L.B.Tate) 선교사는 1905년 (만 43세의 나이가 되어서야)전주예수병원의 설립자, 또다른 매티 테이트 (매티 바바라 잉골드 테이트, Mattie/Martha Barbara Ingold Tate) 선교사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병환으로인해 1925년까지의 한국 사역을 마무리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여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요양하다가 1929년 2월 19일, 향년 66세로 소천한다. 인골드 선교사는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1962년 10월 2일, 향년 95세에 남편 곁에 안장되었고, 그녀의 묘비에도 28년간 한국에서 선교사로 섬겼다고 적혀 있다.
-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 은퇴(1935) 이후 :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1935년 71세의 은퇴 정년으로 한국에서의 43년 간의 (1892~1935) 선교사역을 마치고 1935년 7월 9일, 본국으로 귀국하여 미국 시애틀 항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과 전주를 잊지 못했고 사역 사례 월급은 필요 없으니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해 줄 것을 남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에 요청했다. 1936년 다시 전주로 귀환하여 선교사역의 일을 하였으나 이미 고령의 나이가 다른 선교사에게 짐이 된다고 판단하여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한국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전주지역의 교인들은 그녀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면서, 한국 교회와 맺은 영원한 약혼의 증표로 설명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이것을 약혼반지로 부르며 아꼈다. 1938년 (당시 나이 73세) 다시 본국, 그녀는 자신의 고향(미조리 주 칼라웨이 카운티 풀턴)의 바로 인근 마을, 미주리 어드레인 카운티의 멕시코(Mexico)에서 그녀의 조카인 에그버트 밀러(Egbert Miller)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는데 조카 가정은 그녀를 정성껏 봉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 자녀가 이복형제들과 그 가족들과도 좋은 관계로 교제했음을 드러낸다.
-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 소천(1940): 1940년 4월 1일 (향년 75세), 매티 테이트(M.S.Tate) 선교사는 한국교회가 마련한 약혼반지를 낀 채 고향 풀턴의 공동묘지에서 그녀의 모친 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