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Davis

리니 데이비스 Linnie Fulkerson Davis

  • 1862년 6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Abingdon에서 출생
  • 1892년 9월 7일 남장로교 7인 개척선교사 St.Louis에서 합동 예배를 드림
  • 1892년 10월 18일 7인 개척선교사 중 가장 먼저 조선 입국
  • 1898년 선교사 William Butler Harrison과 결혼
  • 1903년 6월 29일 Typhus에 감염되어 41세로 별세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역과 삶

가정환경 및 성장 배경 

리니 풀커슨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는 1862년 미국 버지니아주 워싱턴 카운티의 수도였던 애빙던(Abingdon)에서 태어났다. 당시 애빙던에는 지역 명문가인 데이비스(Davis) 가문과 풀커슨(Fulkerson) 가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부친인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Archimedes Davis Senior)는 1811년에 제임스 데이비스(James Davis Senior)와 낸시 스미스 데이비스(Nancy Smith Davis) 사이에서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인 메리 반스 풀커슨 데이비스(Mary Vance Fulkerson Davis)는 아브람 풀커슨(Abram Fulkerson Senior)과 마가렛 라플린 반스 풀거슨(Margaret Laughlin Vance Fulkerson) 사이에서 5남 3녀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리니 데이비스가 세 살이 되던 1865년에 부친이 사망하여 그녀는 신앙이 좋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리니 데이비스는 스톤월잭슨여학원(Stonewall Jackson Female Institute)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는 1868년 애빙던의 싱킹스프링장로교회(Sinking Spring Presbyterian Church)에서 시작되었다. 애빙던에서 가장 오래된 이 장로교회가 바로 데이비스 가문과 풀커슨 가문의 모교회였다. 데이비스 가문은 이 장로교회의 설립 당시부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대를 이어 장로로 헌신하였다. 리니 데이비스의 증조할아버지인 존 데이비스(John Davis)는 물심양면으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또한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인 증조할머니 메리 알리슨 데이비스(Mary Allison Davis)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할아버지인 제임스 데이비스였다. 증조할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제임스 할아버지도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경건한 삶을 실천하였다. 싱킹스프링장로교회에서 출발한 스톤월잭슨여학원은 1914년 남장로교의 몽고메리 노회(Mongomery Presbytery)가 인수하면서 그 이름을 스톤월잭슨대학 (Stonewall Jackson College)으로 바꾸었다. 남북전쟁 때 북부군의 거센 공격에도 아랑곳없이 ‘돌담’(Stonewall) 처럼 버티고 서서 자신의 부대를 진두지휘한 남부동맹의 영웅이었던 토마스 잭슨(Thomas J. Jackson, 1824~1863)을 기려 교명으로 삼은 것이다. 

선교사의 꿈 

데이비스는 어렸을 때부터 오지의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녀의 선교사 자원(自願)은 29살 되던 1890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는 아프리카 콩고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선교지로 아프리카를 신청했다. 하지만 선교본부는 젊은 여성의 몸으로 그곳의 기후와 환경을 감내할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그녀의 파송에 난색을 표했다. 대신 미국에 인접한 멕시코의 마타모라스(Matamoras) 지역을 권했으나 오지 선교에 대한 데이비스의 집념은 그 발걸음을 한국으로 향하게끔 하였다. 당시 한국은 콩고에 버금가는 열악한 피선교지 가운데 하나였다. 

남장로교 7인의 개척자 중 가장 처음으로 조선 입국 

데이비스는 1892년 남장로교의 “7인의 개척자”(the pioneer band of Seven) 가운데 한 명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1892년 9월 세인트루이스에 집결하여 합동 예배를 드린 후 함께 출발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캔자스시티에서 레이번의 남편 전킨이 후두염을 심하게 앓게 되어 데이비스와 테이트 남매만 먼저 떠나게 되었다. 데이비스의 일행 중에는 한국인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워싱턴 주재 조선 대리공사 이채연의 부인이었다. 이채연 부인은 1887년부터 주미공사관 관원이 된 남편과 함께 워싱턴 D.C.에서 생활했는데 부인의 건강 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귀국을 결심하였다. 고국에 돌아갈 방법을 수소문하던 중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행을 알고 연락을 취하여 동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데이비스는 버지니아의 세일럼(Salem)에서 처음 이채연 부인을 소개받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동행하였다.  

데이비스 일행은 10월 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태평양을 건너오는 도중에 많이 아팠던 이채연의 부인 때문에 데이비스는 다시 테이트 남매와 헤어져 조기 내한을 서둘렀다. 그래서 10월 7일 요코하마를 떠나 10월 11일 코베에서 배를 타고 부산과 제물포를 거쳐 10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데이비스를 제물포에서 맞은 이는 북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모펫(S. A. Moffett)이었고, 미국 공사관 서기로 있었던 앨런의 부인의 초청으로 우선 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스는 남장로교의 선교사 중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디딘 사람이 되었다. 나머지 6명의 선교사들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6일 뒤인 1892년 11월 4일이었다. 

남장로교 선교부의 서울 선교 거점 

당시 미국 공사관의 서기로 있었던 앨런의 가족은 독일 공사의 저택을 매입해 살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관 부지에 새로운 집을 지어 곧 이사할 예정이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 저택을 매입해서 서울 선교 거점으로 사용하기를 기대했다. 그 바람대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마련했던 임시주택을 떠나 11월 12일 그곳에 정착하였다. 북장로교의 정동스테이션(지금의 예원학교 자리)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그 집을 다른 선교사들은 딕시(Dixie:미국 남부의 여러 주들을 통칭하는 용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대부인(代婦人) 리니 데이비스의 여성과 어린이 사역

데이비스는 1893년 봄부터 딕시 구내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시작 했다. 매일 오후 3시에 동네의 아이들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모아 그림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또 함께 “예수 사랑하심은” 등의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법도 가르쳤다. 약 4년간의 서울 체류 기간 중 데이비스의 아동 선교는 동료 선교사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딕시에 오래 살 수 없었다. 혼인한 부부와 미혼의 여성이 한 집에서 함께 거주하는 것은 당시 한국인들의 관습에 위배되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1894년 늦은 봄부터 북장로교의 미혼 여성 선교사인 수잔 도티(Susan A. Doty)의 집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티의 집은 북장로교와 북감리교의 스테이션이 있었던 정동에서 4km 정도 떨어진 곳(인성부재, 지금의 서울시 중구청 자리)에 있었다. 데이비스는 거기서 20~30명의 아이들로 매일학교를 운영했다. 일요일에는 다시 자신의 방에 여성과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에 이 모임은 레이놀즈가 가세하면서 남장로교의 서울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인성부재 채플로 발전하였다. 1896년 11월 군산스테이션으로 부임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데이비스는 인성부재 사역에 헌신하였다. 

머지않아 데이비스의 인성부재 사역은 동료 선교사들뿐만이 아니라 서울의 선교사들에게 회자되었다. 데이비스는 매일 저녁 20여 명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된 데이비스의 열정적인 전도에 선교사들이 오히려 그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1896년 봄 동료들이 그의 등을 떠밀어 일본여행을 보낸 것도 그런 염려 때문이었다. 그해 인성부재 채플에서는 18명을 세례 문답한 결과 2명(남자 1명, 여자 1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세례 받은 그 여성은 데이비스를 통해 예수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다른 8명의 학습인은 죄를 범해서 단번에 세례 받지 못했고, 그중 몇은 감리교회로 갔다. 또 1896년 가을에는 4-5명의 여성이 세례를 기대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를 만나면 인성부재 채플의 교인들은 ‘대부인 오시오’(Day Pween osio)라면서 반가움을 표시했다. 대부인(代婦人)은 데이비스 부인의 한국 이름이었다. 

군산에서의 사역과 윌리엄 버틀러 해리슨과의 결혼 

1896년 11월 3일에서 6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5회 남장로교선교부 연례회의에서는 데이비스를 군산스테이션으로 배정했다. 데이비스는 4년동안의 서울 생활을 뒤로 한 채 그해 11월 12일 군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데이비스는 즉시 여성과 어린이 사역에 착수했다. 머지않아 1명의 한국인 여성이 정기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채 1년이 되지 않은 이듬해 여름에 데이비스는 1주 동안 총 5개의 모임을 지도해야만 했다. 그중 두 개는 성인여성반이었고 다른 두 개는 소녀반, 나머지 하나는 소년반이었다. 성인여성반은 20명 이상이 참석하였는데, 하나는 데이비스의 집에서 모였고, 다른 하나는 선교 구내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회집 장소를 두었다. 20여 명의 성인여성들 가운데 글을 읽을 수있는 이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주일날 교회에 출석했다. 1897년 10월 군산스테이션 구내 데이비스의 사랑방에서 열린 선교부 제6회 연례회의에 참석했던 선교본부의 체스터 (S. H. Chester)는 데이비스의 여성 사역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본국 총회에 총무 자격으로 보고한 바 있다.  

1896년 2월 20일 남장로교의 새로운 선교 인력이 서울에 도착했고, 다음날인 2월 21일 데이비스가 살고 있는 도티의 집을 인사차 방문했다. 바로 켄터키주 출신의 윌리엄 해리슨이었다. 원래 전주로 파송되었던 해리슨은 1896년 12월 10일부터 1897년 3월 5일까지 군산의 선교 구내에 머물렀다. 군산의 남성 선교사들인 전킨과 드루가 여러 가지 선교 사무를 처리하느라 서울에 가 있었으므로 그들 대신 군산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군산에는 드루의 부인 루시와 데이비스 두 명의 여성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리슨은 전주에서 사역하는 틈틈이 군산을 방문하여 데이비스와의 교제를 이어 갔고, 1897년 11월 데이비스에게 청혼을 하였다. 

데이비스와 해리슨은 1898년 6월 9일 목요일 오후 4시 30분 서울 도티 하우스에서 레이놀즈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 최초의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데이비스의 제자인 정신여학교의 학생들과 한성부윤(서울시장) 이채연 부부, 미국 총영사 알렌 부부와 두 아들, 북장로교의 여선교사들과 레이놀즈와 벨의 부인 그리고 새뮤얼 무어 (Samuel F. Moore, 모삼열) 부부 등이 하객으로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데이비스 부부는 곧 일본으로 출국하여 현지 선교사인 카메론 존슨의 집에 머무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또 마침 일본 아리마에서 교파를 초월한 동아시아선교사대회(Arima Conference)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하여 다른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건강의 악화, 1년간의 안식년 

1898년 10월 전주에서 열린 제7회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데이비스는 전주로 임지 배정을 받았다. 이제 데이비스는 해리슨 부인이 되어 전주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부터 데이비스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동료 선교사들이 우려했던대로 내한 후 7년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선교에 진력한 결과였다. 1899년 9월 제물포에서 열린 제8회 선교부 연례회의는 데이비스에게 안식년 휴가를 권고했다. 데이비스는 그 사이 상태가 더 나빠져 회의에 참석치 못하고 서울에서 요양해야 했다. 데이비스 부부는 1898년 10월 한국을 떠나 1년 동안 켄터키주 레바논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한국 선교 현장으로 복귀, 전주에서의 사역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자 데이비스는 다시 남편과 함께 한국 선교 현장에 복귀하였다. 부부는 1900년 10월 8일 캐나다의 밴쿠버를 떠나 11월 5일 제물포를 통해 입국했다. 군산스테이션의 드루와 신임 선교사 윌리엄 불(William F. Bull, 부위렴)이 배를 몰고 제물포까지 와서 그들을 기다렸다. 데이비스는 군산을 거쳐 전주와 군산의 중간 지점인 송지동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송지동교회의 교인 두 명은 군산까지 와서 데이비스 부부를 영접했다. 11월 10일에는 전주교회 교인들이 데이비스 부부를 위한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데이비스 부부는 이전 레이놀즈의 사택에 짐을 푼 뒤 선교 사역을 재개하였다. 당시 레이놀즈와 테이트 남매 등이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내고 있었던 관계로 전주에는 의료선교사 잉골드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리슨과 데이비스는 선교사들의 안식년으로 인해 생겨난 전주의 선교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1901년이 되면서 전주의 선교 상황은 더욱 좋아졌다. 전주교회의 교인 수가 많이 늘었고, 화산 스테이션 조성 공사도 시작되어, 잉골드의 의료 사역을 위한 여성진료소와 데이비스의 사택이 지어졌다. 해리슨은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그해 7월 남장로교 최초의 교육기관인 전주 남학교(신흥학교)를 개교했다. 1891년부터 데이비스를 잘 알고 있던 카메론 존슨이 전주를 방문하여 데이비스 부부와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데이비스는 남편의 사역을 지원하는 한편 독자적인 활동가로서 전주의 여성과 어린이 선교에 매진하였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사망 

하지만 데이비스의 전주 선교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몸에 결핵이 찾아왔고 데이비스는 그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데이비스는 1903년 6월 20일 41세의 나이로 전주에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결과였다. 한국 선교 11년, 결혼 5년 만에 벌어진 일이 었다. 데이비스의 순직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 그녀의 삶과 사역을 기리기 위해 작성된 기념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이 부인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모든 사람의 모범이라서 사람을 감동케 함이 많음으로 우리 전도국 위원들이 칭찬하기를 “이는 참으로 우리 선교사 중 제일 아름다운 자라” 하였나이다.’ 그녀는 롤 모델이었던 목회자 제임스 삼촌을 통하여 한 영혼에 대한 사랑, 선교적 열정, 그리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리니 데이비스는 전주 선교사 묘역에 묻혀 있으며 지금도 전주 화산 언덕에 가면 그녀의 무덤과 묘비를 만날 수 있다.  

References

송현강. “19 세기 내한 남장로교 여성 선교사 연구.” 남도문화연구 42: 137-166.

최은수. “미국 남장로교 파송 최초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에 관한 연구(1)~(6).”, 교회와 신앙,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61.